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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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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술라의 지지자로서 마리우스파 숙청에 참여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으며, 로마 최초의 소방대를 창설하고,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으나, 파르티아 원정에서 카르하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 크라수스는 부와 권력을 동시에 추구했으나, 군사적 업적 부족과 탐욕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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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인물 정보
이름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로마자 표기Marcus Licinius Crassus
별칭디웨스 (금만)
출생기원전 115년경
사망기원전 53년 6월
사망 장소카르라에 (현재의 하란) 근처
사망 원인전사
국적로마인
직업군사령관 및 정치가
소속제1차 삼두 정치
관직로마 집정관 (기원전 70년, 55년)
배우자테르툴라
자녀마르쿠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부모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베눌레이아
가문리키니아 씨족
군사 경력
충성로마
술라
복무 기간기원전 86년–53년
주요 전투술라 내전
콜리나 문 전투
제3차 노예 전쟁
칸테나 전투
실라루스 강 전투
로마-파르티아 전쟁
카르라에 전투
로마 관직
레가투스?기원전 83년-82년
프라이토르기원전 73년
프로콘술 (대 스파르타쿠스)기원전 72년-71년
콘술 I기원전 70년
켄소르기원전 65년
신관기원전 60년-53년
토지 분배 10인 위원기원전 59년
콘술 II기원전 55년
프로콘술 (시리아)기원전 54년-53년
속주 총독
속주슈리아 (기원전 53년)
지휘 전쟁
전쟁제3차 노예 전쟁
카르라에 전투
이미지
흰색 남성 흉상
로마 조각, 전통적으로 크라수스로 알려짐.
기타
로마자 표기M. Licinius P. f. M. n. Crassus Dives

2. 가문과 초기 생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로마의 오래되고 존경받는 평민 가문인 리키니아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이며, 할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12](기원전 약 126년 법무관)는 로마 풍자의 창시자인 가이우스 루킬리우스에 의해 아겔라스투스(Agelastus, 웃지 않는 또는 엄숙한)라는 그리스식 별명을 얻었는데, 평생 단 한 번 웃었다고 한다.

크라수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고,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술라의 내전 기간에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잃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지지자들이 옥타비아누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기원전 87-86년 겨울에 크라수스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로마에서 살해당하거나 자결하였다.[8][9] 이후 크라수스는 형의 미망인인 테르툴라와 결혼하였다.

마리우스의 숙청과 그 이후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살아남은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지지했던 로마 상원의원들과 기사들에게 단죄령을 내렸다. 킨나의 단죄령으로 크라수스는 히스파니아로 도망쳐야 했다.[13]

2. 1. 초기 경력

기원전 97년에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들로 태어난 크라수스는 동맹시 전쟁에서 형제를 잃었고, 기원전 87년 마리우스술라의 내전 기간에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잃었다. 마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와 술라파를 숙청할 때, 크라수스는 킨나의 박해를 피해 히스파니아로 도망쳤다.[13] 기원전 84년 킨나가 죽은 뒤에는 아프리카로 가서 술라의 편에 합류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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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가 로마로 다시 돌아올 때, 크라수스는 술라의 충실한 협력자로 함께 로마로 입성했는데, 이때 로마 성문에서 벌어진 콜리나 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52] 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끈 우익은 삼니움 군을 격파하여 술라의 승리에 기여했다.

로마로 복귀한 크라수스는 자신의 가문의 재산을 되찾는 데 힘썼다. 술라가 마리우스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프로스크립티오)에 들어가자, 크라수스는 이에 편승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18] 크라수스는 은광산의 노예 거래, 화재가 난 집에서의 재산 거래 등 악랄한 방법으로 엄청난 재산을 불려나간 것으로 악명 높았다.[7][23][5] 당시 크라수스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술라 사후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정치적으로 평판은 좋지 않았다. 당시 상당한 군사적 업적을 쌓은 폼페이우스에 비해 자신은 군사적 업적이 없었기에 집정관직 등 로마의 공직에 오를 가망이 없었다.[21]

3. 스파르타쿠스의 난 진압

기원전 73년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로마 최고의 장군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동방에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 있었다. 원로원의 안일한 대응으로 반란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급기야 2명의 집정관이 토벌군으로 나섰으나 스파르타쿠스에 모두 패하고 말았다.

크라수스는 8개 로마 군단을 거느리고 잔인하게 반란군을 진압해 나갔다. 군단병들을 다그치고 본보기로 아군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방식으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생존자 6,000명들을 십자가형으로 죽였다.[28]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 남서부 브루티움(Bruttium) 반도로 후퇴하자,[30] 크라수스는 레기움(Rhegium) 반도에 해자와 성벽을 건설하여 노예 군대를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군대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다.[31]

이후 폼페이우스와 루쿨루스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이탈리아로 소환되자, 스파르타쿠스는 세 개의 군대 사이에 갇히는 것보다 싸우기로 결정했다. 실라리우스 강 전투(Battle of the Silarius River)에서 크라수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6,000명의 노예를 생포했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직접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32] 포로로 잡힌 6,000명의 노예들은 크라수스의 명령에 따라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3. 1. 폼페이우스와의 경쟁과 갈등

기원전 73년 이탈리아에서 제3차 노예 전쟁이 일어나자,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 등에게 군대를 맡겼으나 모두 패배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산으로 훈련한 부대를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군을 진압하겠다고 제안했고, 원로원은 이를 승인했다. 크라수스는 레가투스(총독 대리) 뭄미우스에게 전투를 피하고 상황을 살피도록 지시했지만, 뭄미우스는 명령을 어기고 스파르타쿠스에게 전투를 걸었다가 참패했다. 크라수스는 본보기로 십분의 일 형을 실시해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지만, 한편으로는 신망을 잃기도 했다.[53]

기원전 71년, 크라수스는 루카니아에서 스파르타쿠스 군을 포위했다.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 트라키아에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 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스파르타쿠스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전사했다. 크라수스는 포로 6,000명을 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형에 처했다.[53]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와의 결전에서 승리했지만, 북쪽으로 도주하려던 노예군 5,000명을 섬멸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전쟁을 끝낸 것은 자신이다"라고 보고하면서 크라수스는 노예 전쟁의 최대 공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관계는 매우 불편해졌다.[53]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가 집정관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자, 크라수스도 집정관에 출마했다. 결국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크라수스는 로마 시민 1만 명을 초청해 연회를 열고, 각 가정에 3개월치 식량을 나눠주며 부를 과시했다. 크라수스는 뛰어난 언변을 지녔고, 폼페이우스가 시민집회에서 높은 인기를 얻은 것과 달리, 크라수스는 원로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53]

두 사람은 서로의 야망을 위해 술라의 정책을 무효화하고 보이지 않게 경쟁하며 세력을 키웠다. 폼페이우스가 해적 토벌과 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동안, 기원전 65년 크라수스는 감찰관이 되었고, 엄청난 부를 이용해 빚이 있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로마에서 우호 세력을 만들었다. 기원전 62년에는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도움을 주었다.[53]

기원전 66년,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를 독재관으로, 자신은 magister equitum(기병대장)으로 삼아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고 국가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쳤다.[53]

기원전 65년, 크라수스는 감찰관 재임 중 이집트를 사유화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54]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국가 전복 음모에 크라수스가 연루되었다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비난했다. 이 때문에 키케로를 증오하게 된 크라수스는 키케로를 제거하려 했지만, 아들 푸블리우스의 중재로 키케로와 일단 화해했다.[53]

4.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6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중재로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39][40] 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각자의 이익을 추구했고, 로마의 정치는 이들 세 명에 의해 좌우되었다. 기원전 59년에는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취임하면서, 크라수스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속주 세금징수관(푸블리카누스)에 대한 징세액 감면 규칙이 폐지되고 폼페이우스가 정복한 동방 속주 재편안이 가결되는 등 삼두정치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56]

삼두정치는 세 사람의 정치적 야합이었기 때문에,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를 끊임없이 견제했고, 둘 사이의 불화는 점차 심해졌다.[55]

기원전 56년 루카 회의에서 삼두정치는 다시 만나 협력 관계를 재확인했다. 그 결과,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와 함께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법률을 통해 시리아 속주를 5년간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동시에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를 5년간 통치하는 권한을 각각 부여받았다.[56]

4. 1. 시리아 총독 부임과 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55년 크라수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여,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추진했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고자 했으며, 이를 파르티아 원정을 통해 달성하려 했다.[41] 초반의 쉬운 승리에 고무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과소평가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깊숙이 진격했다. 그러나 카르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고, 크라수스는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4만 명의 원정군 중 1만 명만이 생존했을 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57] 이때,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500기의 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크라수스는 군사적 경험과 신중함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 대한 경쟁심과 개인적인 영광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하게 원정을 강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1]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4만 명의 군대(카타프락토스 1만 명과 보병 3만 명)를 지원하며 아르메니아를 통한 침공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직접적인 경로를 선택했다.[41]

카르하이 전투(현재 터키 하란)에서 크라수스의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인 파르티아 군에게 패배했다. 파르티아 군은 기동성 있는 기마궁수대를 활용하여 로마군을 괴멸시켰다. 크라수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전열 재편성 제안을 거부하고, 파르티아 군의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거북이 진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군은 낙타에 화살을 실어 끊임없이 보급하며 로마군을 공격했다.[43]

크라수스의 부하들은 반란 직전에 이르렀고, 파르티아와의 협상을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장군 수레나와 만나기로 했으나, 협상 과정에서 파르티아 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44]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은 크라수스의 목에 황금을 녹여 부었다고 한다.[45]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머리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여동생과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 아들의 결혼식 축하연에 보내졌다. 두 왕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박카이'' 공연을 관람 중이었는데, 배우가 크라수스의 머리를 소품으로 사용하며 비극의 대사를 읊었다고 한다.[46][47][48] 또한, 크라수스를 닮은 로마 포로에게 여자 옷을 입혀 조롱하는 풍자극이 벌어지기도 했다.[49]

크라수스의 죽음과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의 죽음(기원전 54년)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관계를 악화시켜, 결국 로마 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5. 카르하이 전투와 죽음

기원전 55년 크라수스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뒤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능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원했고,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그것을 이루려 했다. 초반에 파르티아를 상대로 쉽게 승리한 크라수스는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너무 깊숙이 쳐들어갔다.[41][42] 그러나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 군은 파르티아 군에 대패하고,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전사하고 크라수스도 적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했다. 약 4만 명의 파르티아 원정군 중 살아서 도망친 로마 병사는 약 1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로마군은 참패했다. 이때,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로마 기병 500기를 이끌고 본국으로 도망쳤다.[57]

아르메니아의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아르메니아를 통해 침입하면 약 4만 명의 군대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41] 이는 자신의 군대 유지뿐만 아니라, 크라수스 군대에게도 더 안전한 경로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이를 거절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직접적인 경로를 선택했다. 그는 이전에 폼페이우스를 도왔던 오스로에네의 수장 아리아므네스의 지시를 받았는데, 아리아므네스는 파르티아의 첩자였다.[42] 그는 파르티아가 약하고 조직화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크라수스에게 즉시 공격할 것을 촉구했고, 크라수스 군대를 물이 없는 사막으로 이끌었다.

카르라이(현재 터키 하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라수스 군단은 수적으로 열세인 파르티아 군대에게 패배했다. 크라수스 군단은 주로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어, 파르티아 군대가 숙달한 기동성 있는 기마궁수의 공격에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 파르티아 기마궁수들은 후퇴하는 척하면서 뒤로 화살을 쏘는 히트 앤드 런 전술로 로마군을 괴멸시켰다.[43]

크라수스는 자신의 재무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로마 전열을 재편성하자는 계획을 거부하고, 파르티아 군이 화살을 다 써 버릴 때까지 거북이 진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파르티아인들은 낙타에 화살을 실어 궁수들에게 끊임없이 보급하며 해질녘까지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큰 피해를 입고 카르라이로 후퇴했지만, 많은 부상병들을 파르티아군에게 학살당하도록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크라수스의 부하들은 반란 직전에 이르렀고, 파르티아인들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다. 파르티아인들은 크라수스와 만날 것을 제안했었다. 전투에서 아들의 죽음으로 낙담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장군 수레나를 만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진영으로 평화 협상을 위해 말을 타려 하자, 그의 부하 장교 옥타비우스는 파르티아의 함정을 의심하고 크라수스의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로 인해 갑작스러운 싸움이 벌어져 크라수스를 포함한 모든 로마인들이 죽었다.[44]

크라수스가 죽은 후, 파르티아인들이 그의 입에 녹인 금을 부어 그의 부에 대한 갈증을 조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45]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머리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타샤트에서 열린 아르타바스데스의 여동생과 파르티아 왕 오로데스 2세의 아들 파코루스 1세의 결혼식 축하연에 가져다졌다.[46] 두 왕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박카이''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는데, 궁정 배우가 그 머리를 가져다가 "우리는 산에서 궁전으로 신선하게 갓 잘라낸 덩굴을 가져왔다. 놀라운 사냥감을."이라는 구절을 불렀다.[47] 크라수스의 머리는 펜테우스를 나타내는 소품 대신 사용되었고, 아가베가 들고 있었다.[48]

또한 플루타르크는 크라수스를 닮은 로마 포로 카이우스 팍키아누스를 여자 옷을 입히고 "크라수스"와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전통적인 로마의 승리와 권위의 상징을 조롱하는 풍자적인 "개선식"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했다.[49]

크라수스는 전투 중에 죽었다거나, 눕혀진 상태에서 머리와 오른손이 잘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58]

크라수스의 죽음과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의 죽음(기원전 54년 사망)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관계를 억누르던 균형추가 사라져, 결국 로마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6. 크라수스의 유산과 영향

크라수스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로마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재산은 약 1억 7천 40만 세스테리우스로, 이는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정 연간 예산 2억 세스테리우스에 근접하는 수준이었다.[61] 포브스지가 2008년에 선정한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에서 크라수스는 1698억 달러로 8위를 차지했다.[62]

크라수스는 단죄 기간 동안 몰수되었던 가문의 재산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술라의 단죄로 헐값에 경매된 재산을 적극적으로 매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술라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18]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재산은 처음에는 300 탈렌트였으나, 파르티아 원정 직전에는 7,100탈렌트(229톤의 은, 2023년 8월 기준 약 1.6740000000000002억달러)로 증가했다.[20][21]

크라수스는 노예 매매, 은광 생산, 부동산 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았다. 특히, 그는 단죄로 몰수된 재산과 화재로 피해를 입은 건물을 헐값에 사들여 재건하는 방식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7] 그는 로마 최초의 소방대를 조직하여 화재 진압 사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재산을 헐값에 매입하기 위해 고의로 화재 진압을 늦추는 경우도 있었다.[22][7][23][5]

크라수스는 베스타 여사제였던 리키니아의 재산을 탐내어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결국 리키니아의 재산을 얻어냈다.[24]

크라수스는 막대한 부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치와 과시를 피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동료를 선택했다.[25]

크라수스는 재산을 회복한 후 정치 경력에 집중했지만, 군사적 업적에서 폼페이우스 대제에게 가려져 경쟁심과 질투심을 느꼈다.[21]

upright


폼페이우스 대제의 흉상, 덴마크 니카를스베르크 글립토테크

7. 연표

연도사건
기원전 115년경출생
기원전 97년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집정관이 됨
기원전 87년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피해 히스파니아로 도망
기원전 84년술라와 합류하여 마리우스파 제거
기원전 82년콜리나 문 전투에서 술라 군대의 우익 지휘, 승리에 기여[52]
기원전 78년술라 사망
기원전 74년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발발
기원전 73년법무관에 선출
기원전 72년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전쟁의 특별 지휘권 부여받음
기원전 71년스파르타쿠스 격파
기원전 70년폼페이우스와 공동으로 집정관 선출
기원전 65년검열관 선출
기원전 63년카틸리나 역모 발생
기원전 59년제1차 삼두정치 결성, 율리우스 카이사르 집정관 취임
기원전 56년루카 회담
기원전 55년폼페이우스와 공동으로 두 번째 집정관 선출, 11월 시리아로 떠남
기원전 54년파르티아 원정
기원전 53년카르하이 전투에서 참패, 죽음[57]


8. 평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재정적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카이사르가 최고대사제 선거에 출마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 채무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를 지원했다.[59] 당시 원로원 의원들을 괴롭히던 선동가 시키니우스는 크라수스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뿔에 여물을 붙이고 있다"고 답했다.[60]

미국의 잡지 『포브스』는 2007년 크라수스를 총자산 1698억달러로 역사상 8번째 부호로 선정했다.

8. 1. 부정적 평가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재정적 후원자(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최고대사제(최고대사제) 선거에 출마한 카이사르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이 결정된 카이사르가 채권자들에게 출발을 저지당하자 그의 채무를 보증해주기도 했다.[59]

당시 정치가이자 원로원 의원들을 괴롭히던 시키니우스라는 선동가는 크라수스에 대한 공격은 삼갔는데, 이에 대한 질문에 "크라수스는 뿔에 여물을 붙이고 있다"고 대답했다.[60] 이는 뿔로 들이받는 소에 주의를 주기 위해 뿔에 여물을 붙이는 로마의 풍습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9. 대중문화 속의 크라수스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탐욕의 예시로 언급된다.[50]
  • 호워드 패스트의 1951년 소설 ''스파르타쿠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1956년 알프레드 더건의 소설 ''겨울 막사''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 소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병대에 합류한 후 마르쿠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부하가 된 두 명의 허구적인 갈리아 귀족을 따라간다. 등장인물들은 결국 푸블리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의 의뢰인이 된다. 소설의 후반부는 갈리아 서술자가 파르티아와의 전투를 위해 출격하는 크라수스의 운명적인 군대 내부에서 이야기한다. 이 책은 크라수스가 사망하는 순간까지의 지나친 자신감과 군사적으로 무능한 모습을 묘사한다.
  • 스티븐 세일러의 1992년 소설 ''네메시스의 무기''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의 사촌이자 후원자로 묘사되는데, 그의 살인 사건 수사가 소설의 기초를 이룬다. 그는 또한 ''로마의 피''와 ''카탈리나의 수수께끼''에도 단역으로 등장한다.
  • 데이비드 드레이크의 ''청동의 계급''(1986)에서는 잃어버린 군단이 주요 참여자이지만, 크라수스 자신은 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 콘 이글든의 ''황제'' 시리즈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 카르라이 전투의 이야기는 벤 케인의 소설 ''잊혀진 군단''(2008)의 중심이다. 크라수스는 허영심 많고 군사적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루스트룸''(미국에서는 ''음모자''로 출판됨)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이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경력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임페리움''의 속편이다.
  • 콜린 맥컬로의 소설 ''포춘스 페이버릿츠''와 ''카이사르의 여인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는 용감하지만 평범한 장군이자 뛰어난 금융가이자 카이사르의 진정한 친구로 묘사된다.
  • 크라수스(러시아어: Красс)는 아람 하차투리안의 1956년 발레극 스파르타쿠스에서 주요 역할을 맡고 있다.
  • '''영화'''
  • 1960년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기했다.[51] 이 영화는 호워드 패스트의 1951년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 1962년 영화 노예의 주요 악당이며, 배우 클라우디오 고라가 연기했다.
  • 마르쿠스 크라시우스라는 크라수스의 매우 허구적인 버전은 2001년 영화 아마조네스와 검투사들에서 적대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패트릭 버진이 연기했다. 이 영화에서는 그가 스파르타쿠스를 물리치고, 그의 인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그를 가난한 속주로 추방하는 것, 그리고 그가 그곳 주민들에게 매우 잔혹하게 군림하는 것, 아마조네스 여왕 제노비아(이 영화에서 제노비아는 판나이라는 같은 속주에 있는 아마조네스 부족을 다스리는 것으로 묘사된다)를 정복하는 것을 언급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죽인 한 소녀의 손에 죽는다.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2024년 공상과학 서사 영화 메갈로폴리스에서 존 보이트가 연기한 해밀턴 크라수스 3세라는 인물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는 상상 속 미래의 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카틸리나의 음모의 현대적 해석이다.
  • '''텔레비전'''
  • 2004년 TV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주요 등장인물이며, 배우 앵거스 맥페이든이 연기했다.
  • 제3시즌 에피소드 ''제나: 전사 공주''에 등장하며, 콜로세움에서 참수당한다.
  • 사이먼 머렐스가 ''스파르타쿠스: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에서 주요 악당으로 묘사한다. 알프레드 더건의 소설과는 달리,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묘사된다.
  • ''끔찍한 역사''의 다섯 번째 시리즈에서도 언급되었으며, 디지 래스컬의 봉커스를 패러디한 그의 삶에 헌정된 "민트"라는 노래가 사이먼 파나비에 의해 불려졌다.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로마 제국''의 두 번째 시즌에 등장한다.
  • 팔레네와 함께 『제프 웨인의 스파르타쿠스 뮤지컬 버전]』의 두 명의 해설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참조

[1] 논문 Review of: The Licinian Tomb. Fact or Fiction? Meddelelser fra Ny Carlsberg Glyptotek 5 https://bmcr.brynmaw[...]
[2] 서적 Catalogue Roman Portraits. Ny Carlsberg Glyptotek https://ancientrome.[...] 1994
[3] 웹사이트 Tête de Marcus Licinius Crassus https://collections.[...]
[4]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http://www.ancientli[...] 1870
[5] 웹사이트 Richest People in History Ancient Roman Crassus http://www.trivia-li[...] 2009-12-23
[6] 웹사이트 The 20 Richest People Of All Time http://www.businessi[...]
[7]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8]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9] 서적 Bellum Civile
[10] 문서 deducible from their common gentilicium and cognomen, while Cic. Scaur. fragment at Ascon.27G=23C explicitly states that the homonymous consulars who both took their own lives, P. Crassus Dives Mucianus (consul in 131 BC) and P. Crassus (consul in 97 BC), belonged to the same stirpes
[11]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12] 논문 Fact and Fiction: Crassus, Augustus and the Spolia Opima https://www.mcgill.c[...] 2010
[13]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14]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15]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16] 서적 Bellum Civile
[17] 웹사이트 Tête de Marcus Licinius Crassus https://collections.[...] 2024-05-11
[18] 서적 Life of Crassus https://www.gutenber[...] 1892
[19] 서적 Life of Crassus 1916
[20]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2.2 https://penelope.uch[...] 1916
[21]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2.3 https://penelope.uch[...] 1916
[22] 서적 The Great Fire of Rome: Life and Death in the Ancient City
[23] 서적 Crassus: A Political Biography Adolf M. Hakkert 1976
[24]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25]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26] 웹사이트 Nobiles https://penelope.uch[...]
[27] 문서 Legendary Genealogies in Late-Republican Rome
[28]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29] 서적 Bellum Civile 1913
[30] 서적 Spartacus and the Slave Wars Bedford/St. Martins 2001
[31]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32] 서적 Life of Crassus George Bell & Sons 1892
[33]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34]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35] 서적 Parallel Lives, Life of Crassus
[36] 서적 Parallel Lives
[37] 서적 Parallel Lives
[38] 서적 Bellum Civile
[39] 서적 The New Complete Works Kregel Publications
[40] 서적 The Jews in the Roman World Barnes & Noble
[41] 서적 Life of Crassus https://penelope.uch[...]
[42] 서적 Life of Crassus
[43] 문서 Professor of Middle Eastern History, Columbia University
[44] 서적 (1983)
[45] 서적
[46] 서적 The history of Armenia: from the origin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07
[47] 서적 Life of Crassus https://penelope.uch[...]
[48] 서적 (1983)
[49] 서적 Life of Crassus
[50] 웹사이트 A dictionary of proper names and notable matters in the works of Dante https://archive.org/[...] 1968-03-08
[51] 웹사이트 Spartacus https://www.imdb.com[...] IMDb 1960-11-17
[52] 서적 英雄伝
[53] 서적 皇帝伝
[54] 서적 英雄伝
[55] 서적 英雄伝
[56] 서적 皇帝伝
[57] 서적 英雄伝
[58] 서적 英雄伝
[59] 서적 英雄伝
[60] 서적 英雄伝
[61] 서적 로마인 이야기 2013-05-02
[62] 서적 아웃라이어 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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